본문 분석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δέσμιος, 데스미오스)라고 소개한다(1절). 다른 서신 첫머리에 자주 나오는 사도라는 직함은 이 편지에 없고, 그 대신 그리스도를 섬기다가 실제로 구금된 처지를 먼저 밝힌다. 10절과 13절의 “갇힌 중에서”, 그리고 풀려나 방문하기를 바라는 22절의 소망이 그 처지를 뒷받침한다. 헬라어는 “그리스도 예수의 갇힌 자”라는 소유격 표현이고, 개역개정의 “위하여”는 그 관계를 풀어 쓴 말이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으로서 갇힌 자라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지만, 어느 쪽이든 바울의 구금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생겼다. 몸은 매여 있어도 그리스도와 맺은 이 관계가 편지 속 부탁의 근거가 된다. 바울은 디모데를 “형제”라 부르고, 빌레몬을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συνεργῷ, 쉬네르고), 곧 함께 일하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부탁을 꺼내기 전에 같은 주님을 섬기며 이미 맺은 관계를 먼저 확인하는 것이다.
2절의 수신자에는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 그리고 “네 집에 있는 교회”가 들어 있다. “함께 병사 된”은 같은 군대에서 복무하는 동료를 가리키는 말로, 복음을 위해 함께 수고해 온 관계를 군사 비유로 표현한다. 이들이 빌레몬과 어떤 가족 관계였는지는 편지가 설명하지 않는다. “네 집”의 “네”는 단수이므로, 1절에서 이름을 부르고 4절 이후 계속 단수로 말을 거는 빌레몬의 집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다. 바울은 한 집안의 사정에 관한 요청을 그 집에 모이는 교회도 듣게 한다. 4절부터는 주로 빌레몬 한 사람에게 말하지만, 3절의 은혜와 평강은 복수인 “너희에게” 주어지고 25절의 “너희 심령”도 복수다. 편지가 복수의 인사로 시작해 복수의 축복으로 끝나므로, 한 사람을 받아들이는 결정은 그 집의 성도들이 함께 고백하는 은혜와 이어진다. 3절은 그 은혜와 평강이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다고 말하여, 이 공동체가 같은 아버지를 부르는 가족임을 첫머리에서 확인한다.
4-5절에서 바울은 들려온 소식을 근거로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는 기도할 때마다 빌레몬을 기억하며 감사하는데, 그 이유를 빌레몬의 사랑과 믿음을 “들음이니”라고 밝힌다(5절). 헬라어는 “네 사랑과 믿음”을 먼저 말한 뒤 서로 다른 전치사로 두 대상을 잇는다. “주 예수를 향한”에는 ‘프로스’(πρὸς), “모든 성도에게로”에는 ‘에이스’(εἰς)가 쓰였다. 이 배열은 사랑이 성도를, 믿음이 주 예수를 향하는 교차 배열로 읽을 수 있다. 개역개정은 두 전치사를 모두 “에 대한”으로 옮기고 두 대상을 앞에 모아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라고 했다. 어느 쪽으로 읽든 빌레몬의 믿음과 사랑은 주님과 성도 모두에게 관련된다. 바울은 이미 성도들 사이에 알려진 빌레몬의 사랑을 상기시킨다. “모든 성도”라는 말은 뒤에 “사랑 받는 형제”로 불릴 오네시모를 미리 생각하게 한다. 공동체의 일부만 사랑해서는 이 칭찬에 맞게 살 수 없다. 감사와 기도로 시작한 이 칭찬은 뒤의 부탁을 준비한다.
6절은 바울이 빌레몬을 위해 무엇을 기도하는지 밝힌다. “네 믿음의 교제”에서 “교제”(κοινωνία, 코이노니아)는 어떤 것에 함께 참여하고 서로 나누는 관계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빌레몬이 지닌 믿음을 다른 성도들과 함께 나누는 관계, 곧 같은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 믿음으로 서로 묶여 있는 관계로 읽을 수 있다. 이 교제를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활동 하나로 좁히면 편지에 거듭 나오는 동반자의 관계를 놓치기 쉽다. Alistair I. Wilson은 이 구절을 전도 활동으로만 읽는 풀이를 경계한다.1 개역개정은 “이로써 … 역사하느니라”라고 이미 일어나는 결과처럼 옮겼지만, 헬라어 문장은 4절의 기도가 구하는 내용을 밝힌다. 바울은 성도들이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깨닫는 가운데 믿음의 교제가 실제로 힘 있게 작용하기를 구한다. 헬라어에는 개역개정에 드러나지 않은 “모든”(παντὸς, 판토스)이 있어,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이 받은 선한 것 전체를 깨닫고 인정하는 일을 가리킨다. 이 앎과 교제는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곧 그리스도를 향한다. 17절에서 개역개정이 “동역자”로 옮긴 낱말은 κοινωνία와 같은 어근이고, 그 관계가 영접하라는 요청의 근거가 된다. 믿음을 함께 나눈다는 고백은 한 형제를 어떻게 대할지 정하는 자리에서 실제 힘을 드러낸다.
7절에서 바울은 빌레몬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다고 말한다. 그 사랑으로 성도들의 마음이 실제로 쉼을 얻었기 때문이다. “마음”으로 옮긴 σπλάγχνα(스플랑크나)는 본래 몸의 내장을 가리키는 말로, 사람의 가장 깊은 애정과 정서를 나타낼 때 쓰인다. “평안함을 얻었으니”(ἀναπέπαυται, 아나페파우타이)는 쉼을 얻었다는 뜻의 완료형으로, 빌레몬이 베푼 쉼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두 낱말은 편지 뒤에서 다시 나온다. 12절에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자기 마음이라고 부르고, 20절에서는 같은 동사의 명령형(ἀνάπαυσόν, 아나파우손)으로 “내 마음이 … 평안하게 하라”고 요청한다. 빌레몬에게 쉼을 얻은 성도들과 바울이 자기 마음처럼 여기는 오네시모가 같은 낱말로 묶인다. 그래서 바울은 이미 여러 성도를 쉬게 한 빌레몬에게 이제 자기 마음도 쉬게 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 7절 끝의 “형제여”도 20절에서 반복된다. 바울은 빌레몬을 형제로 부르면서, 그가 곧 오네시모를 형제로 맞아들일 사람임을 일깨운다.
8-9절에서 편지는 감사에서 부탁으로 넘어간다. 8절의 “이러므로”는 7절에서 확인한 빌레몬의 사랑을 부탁의 근거로 삼는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곧 거리낌 없이 말할 자유와 확신을 가지고 “마땅한 일”을 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명령할 권한과 해야 할 일을 알면서도 9절에서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라고 말한다. “간구하노라”(παρακαλῶ, 파라칼로)는 곁에서 권하고 호소하는 말이며, 10절에서 다시 나와 부탁의 대상인 오네시모를 소개한다. “사랑으로써”(διὰ τὴν ἀγάπην, 디아 텐 아가펜)는 직역하면 “사랑 때문에”이므로, 5절과 7절에서 칭찬한 빌레몬의 사랑이 이 호소의 근거가 된다. 바울은 자신을 “나이가 많은” 사람이며 노년에 더해 “지금 또” 갇힌 사람이라고 소개하는데, 여기서 1절의 “갇힌 자”라는 말이 다시 나온다. 이런 자기소개는 듣는 사람에게 도덕적 무게를 지니므로, 부드러운 말투가 부탁의 권위를 없애지는 않는다. 바울은 강제하는 대신 빌레몬과의 신뢰에 호소하여 자발적인 선한 응답을 구한다.
10절에서 바울은 부탁할 사람의 이름을 밝힌다. 헬라어 문장은 “내 자녀”를 먼저 말하고 “갇힌 중에서 낳은”이라는 설명을 덧붙인 뒤, 맨 끝에 “오네시모”라는 이름을 둔다. 빌레몬은 이름보다 그가 바울의 자녀라는 사실을 먼저 듣는다. 개역개정이 “아들”로 옮긴 τέκνου(테크누)는 성별보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드러내는 “자녀”라는 말이다. “낳은”은 바울이 갇혀 있는 동안 오네시모가 믿음에 이른 일을 출생에 빗댄 표현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4:15에서도 복음으로 고린도 성도들을 낳았다고 말한다. 11절의 “무익하였으나”(ἄχρηστον, 아크레스톤)와 “유익하므로”(εὔχρηστον, 유크레스톤)는 “쓸모 있는”이라는 같은 어근에 부정의 접두사와 “좋은”을 뜻하는 접두사를 붙여 전과 지금을 대조한다. 오네시모라는 이름이 “유익한” 또는 “쓸모 있는”이라는 뜻을 지니므로, 이 대조는 그의 이름과 어울리는 말놀이가 된다.1 NA28은 “이제는” 뒤의 ‘카이’를 [καὶ]처럼 대괄호로 묶어, 이 낱말이 원래 본문에 속하는지 확정하기 어렵다고 표시한다. 이 낱말이 있으면 “이제는 너에게도 나에게도”라는 강조가 생기지만, 없어도 문장의 뜻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헬라어는 “너에게와 나에게”의 순서이고, 개역개정은 “나와 네게”로 순서를 바꾸었다. 전에는 빌레몬에게 무익했던 사람이 이제는 빌레몬과 바울 모두에게 유익하다. 바울은 “나에게”를 더해 오네시모가 자신과도 관계를 맺고 있음을 빌레몬에게 알린다. 뒤이어 그를 형제로 맞아들이라고 요청한다.
12절의 “네게 … 돌려 보내노니”(ἀνέπεμψά σοι, 아네펨프사 소이)는 형태로는 과거 시제다. 편지를 받는 사람이 읽을 때에는 이미 보낸 일이 되므로, 쓰는 사람이 읽는 사람의 시점에 맞추어 쓰는 편지의 과거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개역개정의 현재형 “보내노니”는 편지를 쓰는 바울의 시점에서 옮긴 것이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내 심복”이라고 부른다. 7절에서 “마음”으로 옮긴 낱말이 여기서는 사람을 가리키므로, 오네시모는 바울의 가장 깊은 애정이 머무는 사람이다. 한국어 “심복”은 본래 가슴과 배를 뜻하는 말에서 나와 마음 놓고 믿는 사람을 뜻하지만, 오늘의 독자에게는 은밀한 일을 맡기는 부하라는 인상을 주기 쉽다. 그 인상만으로는 바울의 애정을 충분히 읽기 어렵다. 오네시모를 받는 일은 바울의 마음을 받는 일과 같다. 13절에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곁에 “머물러 있게 하여” 자신을 섬기게 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개역개정의 “하고자 하나”처럼, 바라기는 했지만 실행하지 않은 소원이다. “네 대신”이라는 말로 바울은 오네시모의 섬김을 빌레몬이 자신에게 드릴 섬김을 대신하는 일로 본다. 개역개정의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는 헬라어로 “복음의 결박 가운데서”다. 원문에는 “내”에 해당하는 말이 없고, 바울이 복음 때문에 매여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곁에서 섬기는 관계를 바랐지만, 실제 결정은 빌레몬의 뜻에 맡긴다.
14절은 13절의 소원에 “다만”이라는 제한을 붙인다. “네 승낙”(γνώμης, 그노메스)은 이 문맥에서 상대의 의사와 판단을 가리킨다. 바울은 빌레몬의 판단 없이는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말하고 그 목적을 밝힌다. 빌레몬의 선한 일이 “억지”로 되지 않고 “자의로” 되게 하려는 것이다. “억지 같이”의 “같이”(ὡς, 호스)는 실제로 강요하지 않았더라도 강요받은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상황까지 피하려는 뜻을 담는다. “너의 선한 일”의 “선”은 6절의 “선”과 같은 낱말이다. 바울이 6절에서 기도한 선이 빌레몬의 실제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뜻이다. 그 선은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관계에 맞는 응답이며, 그것을 선택할 책임은 빌레몬에게 남는다. 바울은 편지 전체에서 거듭 설득하고, 자신이 바라는 영접과 필요한 비용까지 구체적으로 말한다. 그가 구하는 자발성은 관계와 행위를 분명히 밝히는 설득 안에서 나온다.
15절은 14절에 이유를 덧붙이며, 문장 앞의 “아마”(Τάχα, 타카)는 가능성을 나타낸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잠시 떨어졌던 일이 그를 영원히 얻는 관계로 이어질 수 있다는 해석을 조심스럽게 제안한다.1 “떠나게 된 것은”으로 옮긴 ἐχωρίσθη(에코리스테)는 “떨어지게 되었다”는 수동형이다. 문장은 행위자를 밝히지 않고, 그가 떠난 구체적인 경위나 책임도 설명하지 않는다. 이 수동형을 그 이별 속에서 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암시로 읽을 수도 있다. 다만 바울의 “아마”는 그 해석이 하나의 가능성임을 나타낸다. “잠시”와 “영원히”의 대조는 헤어져 있던 시간보다 앞으로 맺을 관계로 눈을 돌리게 한다. “두게”로 옮긴 ἀπέχῃς(아페케스)는 무엇을 온전히 돌려받는다는 뜻으로 쓰이는 동사다.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다시 얻는 일은 잠시 잃었던 사람을 되찾는 일이면서 영원한 관계로 이어진다.
16절은 그 미래를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라고 설명한다. “이 후로는”은 이전과 달라진 관계를 표시하고, “종과 같이”의 “같이”는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어떤 사람으로 여기고 대하는지 묻는다. 개역개정의 “대하지 아니하고”는 이 비교의 뜻을 동사로 풀어 쓴 말이다. “종”(δοῦλον, 둘론)은 자유가 제한된 실제 신분을 가리킨다. 이 문장은 법적 해방을 명시적으로 요구하지 않지만, 그를 대하는 기준을 “사랑 받는 형제”로 바꾼다. 그리스도 안에서 가족이라는 호칭을 얻었다고 해서 빌레몬과 오네시모 사이의 힘의 차이가 곧바로 사라지지는 않는다. 바로 그 차이 속에서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대하는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바울은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 네게랴”라는 논법으로, 오네시모가 바울에게 사랑 받는 형제라면 빌레몬에게는 더욱 그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이유가 “육신과 주 안에서”(ἐν σαρκὶ καὶ ἐν κυρίῳ, 엔 사르키 카이 엔 퀴리오)이며, 개역개정은 여기에 “상관된”을 더해 풀어 썼다. “육신”은 함께 생활하고 일하며 몸으로 겪는 집안의 관계를, “주 안에서”는 같은 주님께 속한 관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사랑 받는 형제라는 고백은 일상의 대우에까지 적용된다.
17절의 “그러므로”는 앞에서 펼친 감사와 설명을 실제 요청으로 모은다. 조건절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에서 “동역자”(κοινωνόν, 코이노논)는 6절 κοινωνία와 같은 어근의 낱말로, 무엇인가를 함께 나누는 동반자를 뜻한다. 개역개정은 1절에서 빌레몬을 부른 συνεργῷ와 24절의 συνεργοί(쉬네르고이), 그리고 17절의 κοινωνόν을 모두 “동역자”로 옮겼다. 앞의 두 낱말은 함께 일하는 사람에, 17절의 낱말은 믿음과 삶을 같이 나누는 관계에 초점이 있다. 바울은 빌레몬이 자신을 그런 동반자로 여긴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고 그 관계를 요청의 근거로 삼는다. “영접하기를”(προσλαβοῦ, 프로스라부)은 사람을 자기 곁으로, 자기 집과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이라는 명령형이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공동체의 생활 안으로 맞아들이라고 요청한다. “내게 하듯”이라는 말은 그 영접의 기준을 바울 자신에게 둔다. 빌레몬이 존중하는 사도와 낮은 신분의 사람이 같은 환대의 기준으로 대우받는 것이다.
18절에서 바울은 오네시모가 “만일” 손해를 끼쳤거나 빚진 것이 있다면 자기에게 계산하라고 말한다. Wilson은 이 조건문의 형식 자체가 사건의 사실성을 보증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1 “불의를 하였거나”(ἠδίκησέν σε, 에디케센 세)는 과거에 끼친 손해를, “빚진 것이 있으면”(ὀφείλει, 오페일레이)은 현재형으로 남아 있는 채무를 가리킨다. “내 앞으로 계산하라”(ἐλλόγα, 엘로가)는 장부에 셈을 올린다는 상업 용어다. 바울은 오네시모 앞으로 있을지 모르는 셈을 자기 이름으로 옮겨 적으라고 하여, 영접을 가로막을 수 있는 비용 문제를 직접 떠맡는다. 19절에서 그는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라고 써서 그 약속을 직접 보증한다. 이어서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라고 덧붙이는데, 말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그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빚진 것”(προσοφείλεις, 프로소페일레이스)은 18절의 ὀφείλει와 같은 동사에 접두사가 붙은 말로, 빌레몬이 자기 자신을 바울에게 빚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 표현에서 빌레몬이 바울을 통해 믿음에 이르렀다고 추론할 수 있지만, 편지는 그 경위를 설명하지 않는다. 돈을 계산하는 자리에서 바울은 빌레몬이 받은 은혜의 무게도 함께 떠올리게 한다.
20절의 “오”는 앞의 부탁에 다시 힘을 싣는 말이고, 바울은 7절처럼 빌레몬을 “형제여”라고 부른다. “기쁨을 얻게 하고”로 옮긴 ὀναίμην(오나이멘)은 소원을 나타내는 희구법으로, “내가 너에게서 유익을 얻기를”이라는 뜻이다. 이 동사는 오네시모라는 이름과 같은 어근에서 나와 11절의 말놀이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 이어지는 “내 마음이 … 평안하게 하라”는 7절에서 빌레몬이 성도들에게 베푼 쉼을 이제 바울에게도 베풀라는 요청이다. 12절에서 바울이 오네시모를 자기 마음이라고 불렀으므로, 바울의 마음을 쉬게 하는 일은 오네시모를 맞아들이는 일과 떨어질 수 없다. 21절에서 바울은 빌레몬의 “순종”을 확신한다고 말한다. 9절에서 명령 대신 간구를 택한 바울이 여기서 순종이라는 말을 쓰므로, 빌레몬이 따를 대상은 바울 개인의 권위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마땅한 일로 읽을 수 있다. 바울은 빌레몬이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 안다고 덧붙이지만, 그 “더”가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는다. 22절에서 바울은 단수 명령형으로 “너는 나를 위하여 숙소를 마련하라”고 말한다. “숙소”(ξενίαν, 크세니안)는 손님을 맞는 환대와 그 거처를 뜻한다. 이어지는 “너희 기도”와 “너희에게”는 다시 복수로 바뀌어 공동체를 향한다. “나아갈 수 있기를”(χαρισθήσομαι, 카리스테소마이)은 “선물로 주어지리라”는 뜻의 미래 수동형이며, 3절과 25절의 “은혜”(χάρις, 카리스)와 같은 어근이다. 바울은 성도들의 기도에 응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들에게 선물처럼 돌려보내 주시기를 바란다.
23-24절의 문안은 바울 곁의 사람들을 빌레몬의 집과 연결한다. 에바브라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ὁ συναιχμάλωτός μου, 호 쉬나이크말로토스 무)로 불린다. 이 낱말은 본래 전쟁 포로를 가리키는 말에 “함께”를 뜻하는 접두사를 붙인 것으로, 2절의 “함께 병사 된”과 더불어 군사 비유를 이룬다. 1절과 9절의 “갇힌 자”와는 다른 낱말이지만, 그리스도를 위해 매인 처지를 나눈다는 뜻은 이어진다. 에바브라가 문자 그대로 바울과 함께 구금되었는지, 그리스도를 섬기다 같은 처지에 놓인 동료를 비유로 부른 것인지는 이 절만으로 확정하기 어렵다.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는 “나의 동역자”(οἱ συνεργοί μου, 호이 쉬네르고이 무)로 소개된다. 1절에서 빌레몬을 부른 말의 복수형이므로, 빌레몬은 바울 곁에서 일하는 동역자들 가운데 자신도 들어 있음을 듣는다. 골로새서 4:10-14의 문안에도 같은 이름들이 나오므로, 두 편지는 같은 동역자들의 관계 안에서 함께 읽을 수 있다. 25절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있기를 비는 축도다. 개역개정은 “우리 주”라고 옮겼지만, NA28 본문에는 “우리”에 해당하는 낱말이 없다. “너희”(ὑμῶν, 휘몬)는 복수이므로, 3절처럼 마지막 축도도 공동체 전체를 향한다. 바울은 편지의 처음과 끝에서 공동체 전체에 은혜를 빈다. 오네시모를 맞아들이라는 부탁은 그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자기 집과 관계에서 실행할 응답이다.
성경신학적 통찰
빌레몬서의 “형제”라는 호칭은 누가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며 그 소속이 생활을 어떻게 바꾸는지 다루는 성경 전체의 흐름과 이어진다. 편지에는 “사랑을 받는 자”, “동역자”, “자매”, “아들”, “형제” 같은 관계의 말이 이어지고, 17절에서는 믿음을 함께 나누는 동반자의 관계가 요청의 근거가 된다. 바울은 이 요청을 빌레몬의 집에 모이는 교회에도 들려준다.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르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는 공동체라면, 같은 주님을 믿게 된 오네시모를 대하는 일도 그들의 고백에 속한다. 성경에서 누군가를 형제라 부르는 일은 그가 어떤 보호와 환대를 받을지에 대한 책임으로 이어진다. 구약의 율법과 예언은 이 책임을 종의 처지에 놓인 동족에게 적용한다.
레위기 25:39-43은 가난 때문에 자신을 팔게 된 이스라엘 형제를 종처럼 부리지 말고 품꾼이나 동거인처럼 대하라고 명한다. 그는 희년에 자기 가족과 조상의 기업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이다(42절). 하나님이 구원하신 사람을 다른 이스라엘 사람이 자기 뜻대로 영구히 소유할 수 없으므로, 가난해 남에게 의존하게 된 상황에서도 형제라는 관계가 경제적 권한의 한계를 정한다. 43절은 그를 엄하게 부리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명하여, 권한을 가진 사람의 태도까지 하나님 앞에 세운다. 바울이 오네시모를 “사랑 받는 형제”라고 부를 때에도, 그를 대할 권한을 가진 빌레몬은 오네시모가 먼저 주님께 속한 사람임을 기억해야 한다. 오네시모는 더 이상 빌레몬이 자기 이익으로만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같은 장은 주위 이방 나라에서 사들인 종을 이스라엘 동족과 다르게 다루며, 그들을 자손에게 기업으로 물려줄 수 있다고 규정한다(25:44-46). 이 구별은 그 법이 고대 이스라엘의 언약 공동체와 당시의 사회 질서 안에서 주어졌음을 보여 준다. 레위기에서 엄하게 부리지 말아야 할 “형제”는 출애굽으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이었다. 빌레몬서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맺어진 관계가 형제의 범위를 정한다. 바울은 오네시모의 가문이나 출신, 법적 지위를 형제 호칭의 조건으로 제시하지 않고, 갇힌 중에 맺은 믿음의 관계를 근거로 그를 맞아들이라고 요청한다. 빌레몬도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된 오네시모를 가혹하게 대하지 말아야 한다.
신명기 15:12-18은 히브리 남종이나 여종이 여섯 해를 섬긴 뒤 일곱째 해에 놓아줄 때 빈손으로 보내지 말고, 양 무리와 타작마당과 포도주 틀에서 얻은 것을 넉넉하게 주라고 명한다. 떠날 수 있다는 허락만으로 그 사람의 이후 생계가 마련되지는 않는다. 신명기는 주인에게 하나님께 받은 복을 나누어 풀려나는 사람이 새 삶을 시작하도록 도우라고 명한다. 15절은 그 이유로 이스라엘도 애굽 땅에서 종이었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속량하셨음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받은 구원의 기억이 다른 사람의 짐을 덜어 주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빌레몬서에서도 바울의 편지는 오네시모를 실제로 영접하는 데 드는 비용과 그를 대하는 방식까지 다룬다.
신명기는 종을 놓아주기 아까워하는 주인의 마음도 다룬다. 18절은 그 종이 여섯 해 동안 품꾼의 삯의 배나 되는 섬김을 했으니 놓아주는 일을 어렵게 여기지 말라고 하며, 하나님께서 주인의 모든 일에 복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한다. 이 말씀은 소유자의 손실 계산을 그대로 인정하지 않고, 그가 이미 얻은 유익과 앞으로 받을 복을 기억하게 한다. 빌레몬에게도 바울의 요청은 자기 권한과 이익을 다시 따져 보아야 하는 부담이다. 바울은 그 부담을 모른 체하지 않고, 손해나 빚이 있다면 자신에게 계산하라고 말한다(빌레몬서 18절). 두 본문은 서로 다른 사회와 상황에 속하지만, 받은 은혜 때문에 이웃의 삶을 위해 재물을 어떻게 쓸지 묻는다는 점에서 이어진다. 선한 일을 억지가 아닌 자의로 하라는 빌레몬서 14절의 권면도 이 기억과 어울린다.
신명기 23:15-16(BHS 23:16-17)은 주인에게서 도망하여 온 종을 그 주인에게 돌려주지 말고, 그가 원하는 곳에서 함께 살게 하며 압제하지 말라고 명한다. 힘을 잃고 피신한 사람의 안전을 주인의 소유 주장보다 앞세우는 말씀이다. 이 본문을 기억하면, 오네시모를 돌려보낸다는 빌레몬서 12절은 쉽게 넘길 수 없는 문장이 된다. 편지는 오네시모가 도망한 종이었는지 밝히지 않지만, 그를 보내는 일은 형제로 대하라는 16절과 함께 들어야 한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보내면서 자신을 받아들이듯 그를 받아들이라고 요구한다. 오네시모를 맞을 빌레몬과 그 집의 교회는 그를 종으로만 보지 않고 형제로 대해야 한다.
예레미야 34:8-22에서 시드기야 왕 때의 예루살렘 백성은 히브리 남녀 종들을 놓아주겠다고 언약하고도 뒤에 다시 그들을 데려다가 복종시킨다. 하나님은 그 행동을 자신의 이름을 더럽힌 일로 책망하신다(16절).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에서 하나님 앞에 맺은 약속을, 사람의 자유를 다시 빼앗는 행동으로 뒤집은 것이다. 예언은 출애굽 때 맺은 언약과, 정해진 해가 되면 팔려 온 히브리 형제를 놓아주라는 명령을 상기시킨다(13-14절). 예레미야의 경고는 좋은 선언을 해 놓고도 생활 속에서 예전의 권한을 그대로 행사하여 그 선언을 뒤집을 수 있음을 드러낸다. 빌레몬서에서도 교회가 함께 듣는 은혜와 사랑의 고백은 한 형제를 대하는 행동으로 확인되어야 한다. 편지가 공동체 앞에서 읽히므로 빌레몬의 선택은 그 공동체의 믿음과 연결된다.
누가복음 4:16-21에서 예수는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의 글을 읽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사명을 말씀하신 뒤, 이 글이 오늘 그들의 귀에 응하였다고 선언하신다. 빌레몬서의 상황은 나사렛 회당의 장면과 다르지만, 두 본문 모두에서 주님의 은혜는 사람이 겪는 억압과 수치, 몸의 삶에 관련된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로서 주 안에서 형제가 된 오네시모를 다른 그리스도인에게 부탁한다. 이 편지에서 주님께 속했다는 고백은 힘없는 사람이 어떤 대우를 받을지와 함께 말해진다. 믿음을 개인의 내면에만 가두면 편지가 내리는 영접의 명령을 설명하기 어렵다.
갈라디아서 3:26-29는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말한다. 그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 종이나 자유인, 남자나 여자가 다 하나다. 이 선언은 누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약속을 이어받을 상속자인가에 관한 논증의 결론으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에 참여하는 자격을 사회적 신분이 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 원칙을 선언하고, 빌레몬서에서는 한 사람의 구체적인 처지에 적용한다. 빌레몬서의 “사랑 받는 형제”라는 말은 오네시모가 그 새 소속에 들어 있음을 밝힌다. 오네시모를 귀하게 대해야 하는 이유는 바울과 빌레몬이 믿는 주님께 그도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11절에서 유익함의 말놀이를 한 뒤 16절에서 형제라는 요청을 부탁의 중심에 둔다.
골로새서 3:9-15는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하심을 입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한다. 11절은 그 안에서 헬라인과 유대인, 할례파와 무할례파, 야만인과 스구디아인, 종과 자유인의 구별이 있을 수 없고 그리스도가 만유이시며 만유 안에 계신다고 고백한다. 이어지는 긍휼과 자비,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는 삶은 새 사람이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를 설명한다. 빌레몬서에서 호칭이 바뀌어야 한다는 요청도 이처럼 실제 행동의 변화와 연결된다. 그리스도가 모든 것이 되신다는 고백은 상대의 과거와 지위를 기억하는 방식을 새롭게 하고, 형제의 유익을 자기 불편보다 앞세워 그를 받아들일 자리를 마련하게 한다.
골로새서 3:22-25는 종들에게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육신의 상전에게 순종하라고 권하면서, 불의를 행하는 사람은 불의의 보응을 받으며 주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고 덧붙인다(25절). 신앙의 고백은 사회적 권한을 가진 사람에게 아무 책임도 묻지 않는 방패가 될 수 없다. 빌레몬서의 구체적인 요청은 오네시모를 대우할 권한을 가진 빌레몬을 향하며, 그에게 오네시모를 영접하고 사랑 받는 형제로 대하라고 요구한다. 주님께 충성한다는 말은 자기가 남을 대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에베소서 2:11-22는 전에 멀리 있던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둘로 하나를 만드시고 중간에 막힌 담을 허셨으며,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간다. 그래서 이방인 신자들도 더 이상 외인과 나그네가 아니고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며 하나님의 권속이다(19절). 에베소서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하나님의 가족이 된 일을 선포한다면, 빌레몬서는 그 가족에 속한 한 형제를 실제로 받아들이라고 요청한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화평은 이처럼 관계와 환대의 요구로 이어진다. 같은 아버지께 나아가는 사람은 믿음의 교제를 자기 식탁과 생활에서 형제를 맞아들이는 행동으로 실천해야 한다.
갈라디아서 4:1-7은 상속자도 어릴 때에는 종과 다름이 없다는 비유로 시작하여,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셔서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을 속량하고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자녀가 된 이들의 마음에 그 아들의 영을 보내셔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신다. 바울은 믿는 사람이 더 이상 종이 아니고 아들이며,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상속자라고 결론짓는다(7절). 하나님이 구원사에서 이루신 변화를 종에서 아들로 바뀐 신분으로 표현한 것이다. 빌레몬서 16절은 오네시모를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대하라고 요청한다. 두 본문의 상황과 표현은 같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새 신분이 사람 사이의 대우를 바꾸어야 한다는 점에서 맞닿는다. 빌레몬서 3절에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르는 인사도 이 소속을 드러내며,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는 빌레몬은 자신도 은혜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된 자녀임을 기억하게 된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먼저 베푸신 구원을 근거로 가난한 형제를 돌보라고 명했고, 예언자는 그 명령을 뒤집은 백성을 책망했으며, 신약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고 선포한다. 받은 은혜는 이웃을 도울 책임을 낳고, 그 책임은 재물과 권한을 쓰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받아들이는 데 생길 부담을 빌레몬에게만 넘기지 않고 자신도 감당하겠다고 하면서, 빌레몬 역시 그 자신을 바울에게 빚졌음을 상기시킨다. 서로 받은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형제라고 부르는 이가 실제로 받아들여지고 함께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일을 자기 문제로 삼는다. 그 중심에는 자기를 내어 주어 사람들을 하나님의 가족으로 받아들이신 그리스도가 계신다.
기독론적 해석
빌레몬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이고, 빌레몬은 주 예수를 향한 믿음으로 칭찬받으며, 오네시모는 “주 안에서” 사랑 받는 형제가 된다. 바울이 명할 수 있는 담대함도 “그리스도 안에서” 나오고(8절), 편지의 처음과 끝에서 비는 은혜도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다. 편지의 실제 요청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맺어 주신 소속에 맞게 사람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어떻게 대할지 결정할 권한이 있어도, 그 사람이 가장 깊이 누구에게 속하는지 정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빌레몬과 바울과 오네시모 사이의 관계도 각자가 그리스도와 맺은 관계에 비추어 다시 보아야 한다.
갈라디아서 4:4-5는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셨고, 그 아들이 여자에게서 나시고 율법 아래에 나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과 율법 아래의 조건을 직접 입으신 목적은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을 속량하고 그들이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는 데 있었다. 아들이 사람의 자리로 오셨기에 사람이 하나님의 가족으로 들어갈 길이 열렸고, 빌레몬서 첫머리에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르는 고백도 이 선물에 속한다. 오네시모를 형제로 부르는 일은 하나님께서 아들 안에서 받아 주신 사람을 같은 가족으로 대하는 믿음의 응답이다. 바울 자신도 그 은혜를 받았기에 갇힌 중에 오네시모를 믿음 안에서 낳은 아버지가 될 수 있었다.
빌립보서 2:5-11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으며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말한다. 빌립보서의 “종”과 빌레몬서 16절의 “종”은 같은 헬라어 낱말이다. 이 낮아지심은 권한을 자기 유익을 위해 붙드는 태도와 반대되는 길이다. 오네시모는 종의 처지에 있던 사람이었고, 그를 구원하신 주님은 스스로 종의 형체를 입고 낮아지셔서 사람을 살리신 아들이시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믿는 사람의 권한은 다른 사람의 삶을 세우는 데 쓰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이셔서 모든 무릎이 그 이름 앞에 꿇게 하셨다는 9-11절은, 그 높아지심이 자기를 내어 주는 순종을 거쳐 왔음을 보여 준다. 빌레몬은 “종 이상으로” 형제를 얻으라는 부탁을 들으면서, 자신을 위해 낮아지신 주님이 어떤 길로 영광을 받으셨는지도 기억하게 된다. 다른 사람의 낮은 처지를 이용해 존중받으려는 삶은 그 주님의 길과 어울리지 않는다.
마가복음 10:42-45에서 예수는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백성을 임의로 주관하고 고관들이 권세를 부리는 방식을 지적하신다. 그리고 제자들 가운데 크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인자가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고 섬기려 하며,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기 때문이다. 그분의 섬김은 다른 사람이 생명을 얻도록 자신을 내어 주는 행동이다. 빌레몬서에서 부탁하는 바울도 그리스도를 위해 갇힌 가운데 자기 부담을 감수하고, 부탁을 받는 빌레몬 역시 사랑 받는 형제를 섬기면서 주님의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 교회 안에서 주님께 충성한다는 고백은 사람 위에 설 자격을 얻는 말로 쓰일 수 없으며, 그분께 받은 권한으로 누구의 유익을 구하는지를 드러낸다.
18-19절에서 바울은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손해를 끼쳤거나 빚진 것이 있다면 “내 앞으로 계산하라”고 하고, 친필로 갚겠다고 약속한다. 오네시모를 맞아들이는 데 생길 수 있는 실제 비용을 자신이 부담하겠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은 죄인을 하나님께 회복시키는 구원의 사역이며, 다른 누구도 그 일을 반복하거나 보충할 수 없다. 바울이 맡는 사람 사이의 빚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속죄는 범위가 다르다. 바울의 부담은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관계를 위해 자기 것을 내어놓는 응답이다. “내 앞으로 계산하라”는 문장을 읽는 사람은 십자가에서 먼저 자신을 주신 주님을 기억할 수 있다.
고린도후서 5:18-21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셨고(19절),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셔서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다(21절). 고린도후서는 죄를 사람에게 “돌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말하고, 빌레몬서는 오네시모의 빚을 바울 “앞으로 계산하라”고 말한다. 두 본문의 셈은 무게와 범위가 다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셈을 처리하신 은혜를 받은 사람이 이제 다른 사람의 셈을 대신 지려 한다는 점에서 두 본문은 이어진다. 같은 장 16절은 이제부터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육신을 따라”는 세상의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방식을 가리키며, 함께 생활하는 집안의 관계를 가리키는 빌레몬서 16절의 “육신”과는 쓰임이 다르다. 빌레몬은 그 일상의 관계 안에서 오네시모를 예전의 신분과 쓸모가 아닌 그리스도 안의 기준으로 알아야 한다.
로마서 15:7은 그리스도께서 받아 주신 것처럼 서로 받으라고 권한다. 개역개정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와 “너희도 서로 받으라”에 쓰인 “받아”와 “받으라”는 빌레몬서 17절의 “영접하기를”과 같은 헬라어 동사를 옮긴 말이다. 그리스도께서 받아 주신 대상은 NA28에서 “너희”이고, 개역개정은 이를 “우리”로 옮겼다. 로마서 15장에서 바울은 믿음이 강한 사람에게 약한 사람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말라고 하며,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다고 말한다(1-3절). 빌레몬서에서는 바울을 동반자로 여기는 사람이 오네시모를 어떻게 받을지 묻는다. 두 상황 모두에서 그리스도의 영접은 사람을 판단하고 받아들이는 새 기준이 된다. 믿는 사람은 상대의 지위가 자기와 같아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를 형제로 받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이미 받아 주셨다는 사실에 응답하여 그가 머물 실제 자리를 마련한다.
로마서 14:7-12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으므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목적은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주가 되시려는 것이었다(9절). 그러므로 형제를 비판하거나 업신여기는 사람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해야 한다. 빌레몬은 오네시모에 대해 현실의 권한을 가진 사람이지만, 주 안에서 그를 형제로 얻으라는 요청을 듣는다. 부활하신 주님의 다스림은 낮은 신분의 사람에게 소망을 주고, 힘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 힘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설명할 책임을 지운다. 빌레몬과 오네시모 모두 자기 일을 주님 앞에 설명해야 한다.
골로새서 4:1은 상전들에게 종을 의와 공평으로 대하라고 명하며, 그들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라고 말한다. 같은 장 9절은 오네시모를 신실하고 사랑받는 형제이자 골로새 성도들에게서 온 사람으로 소개한다. 골로새서가 오네시모에게 주는 이 호칭은 빌레몬서가 요청하는 새 대우와 어울린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누구에게 순종하며 어떤 관계 안에서 살아야 하는지를 경제적 지위만으로 정할 수 없다. 빌레몬이 주 예수와 모든 성도를 향한 자기 믿음과 사랑에 맞게 사는 길은, 바울이 돌려보낸 형제가 그 믿음에 어울리는 대우를 받게 하는 데 있다.
히브리서 9:24-28은 그리스도께서 손으로 만든 성소가 아니라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셔서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셨다고 말한다. 그는 자기를 단번에 드려 죄를 없이 하셨고,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 구원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28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계시므로, 그분께 나아가는 사람은 자기 죄와 연약함을 인정하면서도 은혜를 구할 수 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권하고 오네시모를 돌보는 일도 이 은혜에 기대어 있다.
바울은 성도들의 기도로 그들에게 돌아가기를 바란다고 말한다(22절).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갇힌 사람과 자유로운 사람은 서로를 돌본다. 빌레몬이 바울을 위해 숙소를 준비하고 그를 기도 가운데 기억한다면, 바울이 자기 마음처럼 여기는 오네시모도 그 환대 안에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은 7절과 20절의 표현처럼 다른 사람의 마음에 쉼을 주는 행위로 나타난다.
요한일서 3:16-18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므로 우리가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다. 이어 세상의 재물을 가진 사람이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는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그 안에 거하겠느냐고 묻고,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고 권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고백이 실제로 도울 수 있는 사람의 선택을 바꾼다는 논증이다. 빌레몬서에서도 바울은 오네시모를 사랑 받는 형제로 부른 뒤 그를 받아들이는 데 생길 부담을 다룬다. 바울은 그 책임에 자신을 포함하며, 상대에게 관계 회복을 요구하면서 자기는 아무 부담도 지지 않는 자리로 물러서지 않는다.
편지 마지막에 구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이 관계를 계속 지탱한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오시고 종의 자리까지 낮아지신 일, 십자가와 부활, 승천 후의 다스림과 다시 오실 약속이 이 모든 사람의 삶의 근거다. 그분이 먼저 받아 주셨기에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고, 그분이 자신을 주셨기에 남의 회복을 위해 부담을 나눌 수 있다. 바울은 사랑 받는 형제로 맞아들이라는 구체적인 부탁을 이 은혜에 맡긴다.
현대적 적용
교회는 서로를 형제자매라고 부르면서도 직책과 재산, 나이와 사회적 영향력에 따라 말할 기회와 존중의 정도를 달리하기 쉽다. 빌레몬서는 종의 처지에 있던 오네시모를 사랑 받는 형제로 맞아들이라고 요청하며, 그를 형제라 부르는 사람이 실제로도 그에 맞게 대하도록 요구한다. 사람의 쓸모와 성과부터 묻는 시선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받은 가족의 관계를 가린다.
바울은 무익했던 오네시모가 이제 유익하다고 말하지만, 부탁의 중심에는 그를 “사랑 받는 형제”로 맞으라는 요청을 둔다(11, 16절). 그리스도께 속한 성도를 교회에 얼마나 기여하는지만으로 평가할 수 없다.
편지가 다루는 고대의 종 신분과 오늘의 노동 관계는 서로 다른 사회적 조건에 속한다. 그래도 형제자매라는 이유를 들어 교회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약속한 보수와 휴식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면, 사랑의 언어가 책임을 흐린다. 함께 주님을 믿는 관계는 오히려 상대를 존중하며 약속을 성실하게 지킬 이유가 된다.
빌레몬서는 오네시모가 정확히 어떤 일을 했는지 밝히지 않는다. 그 빈자리를 범죄의 이야기로 채워 넣으면, 불확실한 과거가 한 사람의 삶 전체를 규정하게 된다. 공동체에서 낮은 평가를 받았던 사람이 돌아올 때에도 소문이나 예전의 인상만으로 그를 계속 판단해서는 안 된다. 실제 잘못은 분명히 다루되, 확인되지 않은 동기와 행위를 덧붙이지 않는다.
힘의 차이가 큰 관계에서는 동의한다는 말의 무게도 다르다. 바울은 빌레몬의 자발적인 선한 응답을 구했지만, 사도의 부탁과 교회 앞에서 읽히는 편지, 예고된 방문은 빌레몬에게 압력이 될 수 있었다. 오늘 지도자가 사랑으로 권한다고 할 때도 상대는 거절하기 어렵다고 느낄 수 있다. 부드러운 표현을 썼다는 사실만으로 상대가 자유롭게 응답했다고 여길 수는 없다. 권하는 사람은 상대가 거절하거나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할 자유를 실제로 존중해야 한다.
빌레몬서에서 요구를 받는 사람은 오네시모를 형제로 맞아들일 권한과 책임을 가진 빌레몬이다. 교회가 피해를 겪은 사람에게 먼저 돌아가 참으라고만 말하면, 힘을 가진 사람에게 요구되어야 할 책임은 사라지고 약한 사람의 안전은 뒤로 밀린다. 편지가 빌레몬의 집에 모이는 교회에도 읽혔으므로, 그 변화의 책임은 공동체도 함께 진다. 함께 예배하고 기도한다는 고백은 상대의 몸과 생활이 안전하게 존중받도록 행동하는 데서 드러나야 한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빚진 것이 있다면 자기에게 계산하라고 하여, 화해에 드는 비용을 직접 맡았다. 화해를 돕는 사람도 당사자들에게 관계 회복을 요구하면서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수고와 비용을 맡을 수 있다. 손해나 빚이 실제로 있다면 좋은 감정이 생겼다는 이유로 덮을 수 없다. 바울은 형제로 영접하라는 부탁을 하면서 실제 손해를 갚을 책임도 맡겠다고 약속했다.
바울은 빌레몬 자신도 자기에게 빚졌다고 하며 부탁의 무게를 더한다(19절). 오늘 지도자가 이 구절을 끌어다 쓸 때에는 자신의 위치와 영향력을 함께 돌아보아야 한다. 내가 도왔으니 내 말을 따라야 한다는 요구가 반복되면, 감사는 자유로운 응답의 성격을 잃고 갚을 수 없는 부담으로 변한다. 지도자는 자신을 통해 좋은 일을 경험한 성도가 자기에게 매이지 않고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책임 안에서 살아가도록 섬겨야 한다.